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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信賴), 칼보다 무거운 약속

영남연합포커스 김진우 기자 

 

신뢰란 무엇인가. 말로 풀면 믿고 맡긴다는 뜻이지만, 삶 속에서의 신뢰는 그보다 훨씬 무겁다. 신뢰는 보이지 않으나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강한 끈이며, 때로는 목숨보다 값지게 여겨졌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 다짐을 끝까지 끌어안는 인내가 모여 신뢰가 된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래서 신뢰는 언제나 긴 시간과 침묵을 요구한다.

옛 무사의 정신에서 신뢰는 생존의 조건이었다. 칼을 들고 전장에 선 이들에게 동료의 신뢰는 방패와 같았고, 배신은 곧 죽음이었다. 무사는 말을 가볍게 하지 않았다. 말은 이미 행동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약속은 계약이 아니라 목숨의 일부였다. 한 번 맺은 맹세는 피로 봉인되었고, 그 봉인을 깨는 일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와 같았다. 

 

그래서 무사의 신뢰는 화려한 언변보다 침묵에 가까웠다. 필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고, 결과로 증명했다.

충신의 길 또한 신뢰의 길이었다. 충성은 맹목이 아니었다. 옳다고 믿는 대의를 향해 마음을 다해 서는 것이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태도였다. 왕과의 의리는 개인적 호불호를 넘어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겠다는 약속이었다. 충심은 권력에 굴복하는 자세가 아니라, 권력이 흔들릴 때 중심을 붙드는 자세였다. 

 

충신은 칭찬을 기대하지 않았고, 오해를 감수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은 이유는 신뢰가 단기적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 정의를 향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의 시대에서 신뢰는 더 복잡해졌다. 이해관계는 촘촘해졌고, 선택지는 많아졌다. 말은 넘쳐나고, 약속은 가벼워졌다. 

 

그러나 신뢰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는 일,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일, 불리한 순간에도 기준을 바꾸지 않는 일. 이 단순한 원칙이 여전히 신뢰를 만든다. 다만 우리는 더 많은 유혹 속에서 그 원칙을 지켜야 한다. 빠른 성과, 즉각적인 박수, 손쉬운 타협이 손짓할수록 신뢰는 느리고 고독한 길을 요구한다.

신뢰는 ‘바라기’의 마음과도 닮아 있다. 바라본다는 것은 멀리 본다는 뜻이다. 당장의 이익보다 내일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이다. 

 

그래서 신뢰를 선택하는 사람의 마음은 늘 복잡하다. 손해를 감수해야 할지, 오해를 견뎌야 할지, 침묵을 택해야 할지 수없이 저울질한다. 그 복잡함 속에서도 약속을 놓지 않는 것이 신뢰다. 변명보다 책임을, 설명보다 실천을 택하는 결단이 신뢰를 지탱한다.

 

대의 앞에서 신뢰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선다. 좋아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옳아서 지키는 것이다. 신뢰는 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한 순간을 견디게 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과한 관계만이 오래 간다. 신뢰가 쌓인 공동체는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말이 많지 않아도 방향이 분명하고, 서로의 침묵을 의심하지 않는다.

 

신뢰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전략이 아니라 성품이다.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의 합이다. 그래서 신뢰는 늙는다. 시간의 흔적을 입고, 실수의 자국을 남긴 채 성숙해진다. 완벽해서 신뢰받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다시 기준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신뢰받는다.

 

오늘 우리가 묻는 신뢰는 과거의 무사와 충신이 품었던 질문과 다르지 않다. 무엇을 위해 약속할 것인가. 어떤 기준을 끝까지 지킬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신뢰는 대답이 아니라 선택이다. 매일의 선택이 모여 사람을 만들고, 공동체를 세운다. 칼보다 무거운 약속을 다시 손에 쥘 때, 신뢰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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